연수구 아카이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연수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연수구의 개관

위치와 행정구역

문학산에서 바라본 연수구 전경

행정적 구분

우리 고장 연수구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 속한 구(區)로 인천의 남서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인천의 행정단위는 계양구·부평구·서구·남동구·미추홀구·중구·동구·연수구 등 8개 자치구와 강화군·옹진군 등 2개의 자치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 연수구는 자치구 중 하나랍니다.

상대적 위치

연수구의 서쪽은 서해안에 닿아 있습니다. 송도 1동과 송도 2동, 송도 4동, 송도5동, 동춘 1동과 옥련동이 바다와 접하고 있답니다. 연수구의 북쪽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이고, 그 경계선을 이루는 것이 문학산의 능선입니다. 문학산의 동서로 뻗은 능선은 남쪽의 연수구와 북쪽의 미추홀구를 나눠주는 자연 경계선이지요. 연수구의 동쪽은 남동구입니다.

승기천은 연수구의 동북경계에서부터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승기천 유수지에 모였다가 바다로 흘러나가는데, 연수구와 남동구를 구분하는 자연 경계선이 되고 있습니다. 연수구의 남쪽은 송도1동과 송도2동에 맞닿은 바다가 됩니다. 연수구청 소재지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구 원인재로 115입니다.
연수구의 법정동과 행정구역

행정동, 면적, 인구

연수구의 총면적은 2020년 12월 기준 54.95㎢로 인천광역시 면적의 5%에 당합니다. 연수구에는 선학동, 연수동, 동춘동, 옥련동, 청학동, 송도동 등 모두 6개의 법정동이 있고, 총 15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수구는 본래 인천직할시 남구에 속하였으나, 1995년 3월 1일부로 인천광역시 남구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옥련동, 선학동, 청학동, 연수1동, 연수2동, 연수3동, 동춘1동, 동춘2동 등 8개의 행정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으나, 1996년 동춘2동으로부터 청량동이 신설되어 9개의 행정동이 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옥련동으로부터 옥련2동이 분동되어 10개의 행정동이 되었고, 같은 해 겨울에 청량동이 동춘3동으로 변경되었답니다. 2007년에는 동춘2동으로부터 송도동이 신설되어 11개의 행정동으로 늘어났고, 2012년에는 송도동으로부터 송도2동이 신설되었고, 2014년에는 송도3동이, 2018년에는 송도4동이, 2020년에는 송도5동이 신설되어 현재 모두 15개의 행정동이 된 것입니다.
연수구 행정동에 따른 면적과 인구(2020)
면적 (km²) 인구(명) 세대(호)
청학동 2.39 26,818 12,511
옥련1동 2.15 20,949 8,287
옥련2동 1.92 21,826 7,960
선학동 2.41 18,456 8,138
연수1동 1.66 21,834 10,380
연수2동 1 22,617 9,740
연수3동 0.86 17,847 7,604
동춘1동 3.79 19,099 6,491
동춘2동 1.31 19,679 6,860
동춘3동 0.72 19,411 5,807
송도1동 9.7 34,013 10,722
송도2동 3.7 36,641 11,496
송도3동 10.74 47,414 17,515
송도4동 6.8 24,763 9,055
송도5동 5.7 29,092 10,572

연수의 산과 강

문학산 정상의 봉수대 사진.(이종화 선생 <문학산>에서)

문학산

연수구의 지붕이자 살아있는 역사박물관 비류의 해상왕국 건설의 꿈이 살아 있는 곳
연수구의 북쪽에는 문학산이 동쪽의 길마산에서부터 선유봉과 수리봉을 지나 문학산 정상(217m)을 거쳐 연경산(175m)을 지나 서달산까지 약 4km 정도의 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문학산의 남북사면은 매우 좁고 경사가 심하여 천연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산세가 마치 학(鶴)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유사하여 문학산 주변으로 선학, 청학, 학익동, 문학동 등 학과 관련된 지명이 많습니다. 연수구에 해당하는 문학산의 남쪽 기슭에는 선학동, 연수1동, 청학동, 옥련2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학산 주변에는 선사시대의 문화적 흔적이 매우 많을 뿐 아니라, 비류가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진 미추홀의 옛 터전으로 알려져 인천역사의 기원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문학산 정상에는 문학산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인천을 지켜낸 인천부사 김민선 장군을 기리던 안관당터가 있었으며, 봉수대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의 사모지 고개는 백제의 사신들이 능허대로 가던 교통로이자 다양한 전설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문학산은 인천 사람들에게 역사의 고향이자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기도 하답니다.

문학산의 선유봉이나 수리봉에서는 북쪽에서부터 계양산과 천마산, 원적산, 함봉산, 만월산, 철마산, 거마산, 성주산과 소래산 등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멀리 북한산이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눈에 들어 옵니다. 남쪽으로는 연수구 전체가 들어오고 청량산과 봉재산 너머의 송도신도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문학산의 지맥은 문학산 정상의 남쪽에서 흘러내린 산줄기와 연경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문학산 정상에서 흐르는 줄기는 연수동 함박 초등학교와 문남마을 태산 아파트를 거쳐 함박메(배수지)를 거쳐 적십자병원을 거쳐 솔안공원과 우성아파트 일대까지 흐르는 지맥입니다. 이 산줄기를 중심으로 현재 연수1동과 연수3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연수2동 지역은 연수구의 택지개발공사 과정에서 많이 사라졌답니다.

연경산에서 흐르는 산줄기는 옛 송도역에서 연수구로 넘어오는 흔들못 고개를 지나 영남아파트를 거쳐 청량산을 일으키고, 앵고개를 거쳐 봉제산(117m)으로 흐르다가 동막 해변에서 마감하지요. 한편 문학산의 서달산 남쪽으로는 조개고개를 건너 송양지마을과 송도고등학교를 거쳐 독배(옹암)까지 이어진답니다.
1990년대 재가발 이전의 봉재산

봉재산

청량산의 남서쪽으로 흘러온 구릉성 산지로 군사적 요충지로 각광받은 곳
봉재산은 청량산의 남서쪽으로 흘러온 구릉성 산지로 과거에 바다에 길게 내민 곶지형이었습니다. 지형의 특성에 맞게 이 산은 군사적 요충지로 각광받은 곳이었습니다. 송도신도시가 조성되기 전에는 인천의 해안 방어선이었고, 미사일 기지가 자리잡고 있는 신비스런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산 전체가 요새화되어 있어서 사내 아이들의 재미있는 놀이터가 되기도 했지요.

또한 봉재산은 동막마을, 척전마을(자앞마을), 시듬물, 신촌, 박젯뿌리 사람들이 동막어촌계와 척전어촌계를 통하여 갯벌과 함께 해왔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산이기도 합니다. 연수구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기 이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막도당굿과 갯가리 등의 민속문화를 유지해 왔으며, 영일정씨의 99간 대가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시듬물, 신촌, 박젯뿌리 등의 자연부락 사람들은 조개잡이와 함께 집집마다 외양간을 만들어 젖소를 키우고, 틈틈이 농사까지 해왔던 풀뿌리같은 생활력의 산증인들이기도 했습니다.

봉재산 주변의 자연부락들은 2000년대 들어서 시작된 동춘1동 재개발 사업과 동춘2동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사라지고 있고, 산의 형질이 심하게 변화되고 있답니다. 미사일 기지가 이전한 후에 동춘터널 공사로 인해 봉재산의 정상부 일대는 크게 모양이 변화되었습니다. 동막쪽의 능선에는 송도신도시를 위한 배수지가 조성되어 녹색능선의 흐름은 크게 끊기고 있답니다.
남쪽으로 바라본 청량산의 모습

청량산

경기만의 명산, 자로 금을 재는 형국이라 해서 척량산 또는 청룡이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청룡산이라 불리는 청량산
해발 178m의 청량산은 산의 경관이 수려하여 <동국여지승람>에 청량산이라 전하며, 자로 금을 재는 형국이라고 해서 척량산, 청룡의 기운을 뿜고 있다고 해서 청룡산이라고도 불린 명산입니다. 청량산 남쪽 기슭에는 영일정씨의 묘역과 동곡재가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송도유원지, 인천시립박물관, 가천박물관,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등이 위치하고 있어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청량산 북쪽의 청학동 외국인 묘역은 한국의 근대화과정을 되집어 볼 수 있는 의미 깊은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한편 청량산은 송도국제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천대교, 강화도, 영종도, 용유도, 무의도, 팔미도, 영흥도, 대부도, 오이도, 옥구도 등 경기만 일대의 많은 섬들과 바닷길을 조망할 수 있는 인천의 명소이기도 합니다. 특히 황해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를 감상하는데 그만인 곳이 바로 청량산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재가발 이전의 봉재산

승기천

남동구와 연수구의 자연 경계선 수봉산에서 발원하여 주안동, 관교동, 구월동 거쳐 동막까지 흘러가는 연수구의 하천
연수구에는 승기천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하천이 없습니다. 산세가 낮기 때문에 지형성 강우를 일으키기가 어렵고 유역면적 또한 작습니다. 문학산이나 청량산들의 계곡에서 작은 샘물들이 샘솟고는 있지만 지표면을 적시며 흐르는 개울과 강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승기천은 용현동 수봉산 동쪽 계곡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동양장 사거리를 지나 구월동 농수산물 시장을 거쳐 선학동 도장리 갯골로 흘러든 강이었습니다. 상류와 중류는 1980년대에 복개공사로 강의 모습이 사라졌고, 남동공단 조성과 연수택지개발공사로 인해 승기천 하류의 대규모의 매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승기천의 지금의 모습으로 직선화되어 유수지를 거쳐 바다로 흐르게 되었답니다.

연수의 기후와 환경

인천의 기후

인천광역시는 서해안의 경기만을 끼고 있음에도, 기후에 있어서는 바다의 영향이 크지 않습니다. 겨울은 한랭건조한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춥고 건조하며, 여름은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매우 덥습니다. 봄과 가을에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고 건조한 날이 많습니다. 이처럼 인천의 날씨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의 특성이 강한 중부지방의 기후형에 속합니다.

연수구의 기후 : 기온

우리고장 연수구 또한 해안에 접해있으나 전반적으로 해양성 기후의 특성이 미약하고 대륙성 기후의 특성이 강한 편입니다. 하지만 인천에서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인천 평균기온보다 약 0.5 ℃ 높습니다. 연수구의 지난 6년간(2012-2017)의 연평균 기온은 12.67℃ 로 이전 7년(2005-2011)동안의 평균기온인 12.37℃ 보다 0.3℃ 올라갔습니다.

강수

지난 6년간 (2012-2017)의 연수구 연평균 강수량은 911.3mm입니다. 2014년부터 2017년 까지 4년동안 강수량이 1,000mm 이하를 기록하고 있어 최근 기후변화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름철(7,8월)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70%에 이르며, 여름철에 비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평균 상대습도는 74.12%입니다.

바람

지난 6년간(2012-2017) 연수구의 연평균 풍속은 2.9m/s이며, 바람은 계절풍의 영향을 크게 받아 겨울에는 북서풍이 강하고 여름에는 주로 남서풍이 붑니다.연수구는 바다에 접한 지역 특성으로 인해 낮에는 해풍(서풍), 밤에는 육풍(동풍)이 불고 있습니다.

태풍

8-9월에 우리나라로 북상하는 태풍은 대체로 한반도 남부지역과 한강의 중하류지역에 큰 피해를 주며 동해상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연수구의 태풍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으나, 기후변화로 인해 예측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황사

중국에서 편서풍대를 따라 이동하는 황사현상이 인천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며, 다른 곳에 비해 그 빈도수가 높고, 지속시간도 긴 편입니다. 황사의 평균 일수는 7.5일입니다.

365 대기상태

연수구의 맑은 날은 지난 6년(2012-2017) 평균 100.17일이며, 흐린 날은 75.17일, 비오는 날은 약 103일로 나타납니다. 안개 낀 날은 평균 42.17일입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으로, 바다에 접한 지역의 특성상 해상의 기온이 높아지는 4월부터 발생일수가 증가하여 수온의 차가 큰 6,7월에 안개가 가장 많습니다. 겨울철 평균 적설일수는 23.5일로 이전 평균인 19.43일보다 높아졌습니다.
  • 연수구 G타워에서 바라본 황사가 낀 날의 연수구(출처 : 신아일보)
  • 2019년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쓰러진 동북아타워 부근의 가로수(출처 : 중앙일보)

연수의 지형적 특성

지도로 본 연수구의 산과 강, 그리고 법정동 연수구는 문학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서해에 인접합니다. 남동쪽으로 남동공단과 맞닿아 있으며, 수봉산에서부터 시작된 승기천이 자연경계선이 되고 있습니다.

문학산의 서쪽 끝 봉우리인 서달산에서부터 동쪽으로 노적산, 연경산, 문학산, 수리봉, 길마산 등이 길게 이어져서 마치 학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청학동, 선학동, 학익동, 문학동 등 학과 관련된 마을 이름이 유난히 많습니다.

문학산의 연경산 남쪽줄기는 남서쪽으로 청량산과 봉재산을 일으킨 후 동춘동 동막마을에서 끝납니다. 청량산(170m)은 높지 않지만 우리나라 서해안의 명산으로 손꼽힙니다. 아암도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자태는 서서히 꿈틀거리는 청룡의 옆모습인 듯 빼어나지요. 위풍당당한 청량산의 기세는 서해바다와 대륙을 향해 용트림을 하는 듯 신비로운 위엄이 있습니다. 그 옛날 바닷길을 열었던 백제인의 숨결은 청량산 북서쪽으로 돌출된 능허대와 한나루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실제로 백제 사신들이 중국과의 통교를 위해 이용하던 장소로, 바닷길을 열었던 백제인들의 당당한 몸짓이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

갯벌과 함께 해온 우리 조상들의 삶이 응어리져 자연부락의 역사로 간직돼 오고 있는 산이 봉재산입니다. 봉재산은 청량산에 바로 연이어 있습니다. 산 주변에는 동막, 자앞, 시듬물, 박짓뿔 등의 자연부락이 남아 있어, 대부분의 자연부락이 사라진 지금도 주민들은 옛날과 다름없이 갯벌에 나가 어패류를 잡고 있습니다. 송도신도시 건설로 갯벌이 매립되고 있어 옛 정취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요.

문학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는 해발 100m미만의 구릉들이 승기천까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는 문학산 정상에서 함박초등학교, 문남마을, 대명아파트, 배수지산, 적십자병원, 솔안공원으로 이어지는 능선입니다. 이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까치섬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연화부수지라하여 인천 최고의 명당자리로 일컬어지는 이곳에는 현재 인천이씨의 중시조 이허겸의 묘가 안장돼 있습니다.

승기천은 연수구와 남동구의 자연경계선입니다. 승기천은 문학산 북쪽의 문학동, 관교동 지역의 물과 주안동, 구월동 일대의 물이 합쳐져 흐르는 강이죠. 이 강물은 선학동을 지나 연수동, 청량동, 동춘동 지역을 남동공단과 갈라놓으며 승기하수처리장 유수지로 모였다가 정수된 물이 서해로 빠져나갑니다. 예전에 승기천하구는 선학동이지만, 바닷가였던 이곳이 매립되어 남동공단과 연수택지지구가 조성됨으로써 강하구가 동춘동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강의 길이도 더 길어졌습니다.

바다를 매립하기 전만 하더라도 연수구는 산줄기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전형적인 해안마을이었습니다. 갯벌에서 가무락, 대합, 동죽, 바지락, 맛살, 꽃게, 숭어, 낙지, 망둥어 따위를 잡는 한편, 방죽을 쌓아 농경지를 확보하려 애써왔습니다. 이후,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 대규모의 천일염전이 조성되어 인천을 소금의 산지로 만드는 주역이 되기도 한 곳입니다. 이 염전들을 다시 농경지로 만들기 위해 방죽을 만들고 수로를 내려 노력해 왔습니다. 주어진 자연 조건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활용하고 변화시켜서 삶의 터전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해 온 것입니다.

지금 연수구는 산줄기 사이로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인구 36만이 거주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농촌에서 도시로 탈바꿈한 연수구의 옛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문학산, 청량산, 봉재산 등은 연수구의 훌륭한 산소탱크가 되어주고 있으며, 서해바다의 비릿한 갯벌내음은 바닷바람을 통해 연수구를 가르고 있답니다.
사라져가는 연수구의 과거 갯벌 모습 (출처 : 신문고뉴스)

연수구의 역사

  • 선사시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 학익고인돌(인천시립박물관) 문학산 일대에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은 B.C. 18년의 비류왕입니다. 그러나 비류왕국이 탄생한 B.C. 18년보다 휠씬 이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이 고장에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문학산 주변의 학익동, 문학동, 청학동 인근에서 발견된 돌칼, 돌화살촉, 돌도끼, 긁개 등은 후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입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문화유적인 지석묘(고인돌)도 문학산 주변에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석묘들은 이 지역에 제법 발달한 부락공동체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문학산 남쪽 연수동, 청학동 접경지역에는 조개무지(패총)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조개무지 역시 선사시대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수렵과 채취활동에 유리한 해안과 갯벌이 발달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 상고/삼국시대

    문학산 정상일대는 비류왕이 세웠다는 비류백제(일명 미추홀왕국)의 도읍지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기를 보면 비류왕이 문학산 정상에 성을 축조하고 이 성을 방패 삼아 비류백제를 세우고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동명성왕)의 아들입니다.

    고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기전 북부여에서 쫓겨나 졸본부여로 밀려왔다가 졸본부여왕의 신임을 받게되지요. 졸본부여왕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이 비류와 온조랍니다. 졸본부여왕은 왕위를 고주몽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왕위를 이어받은 고주몽은 고구려를 세웠는데, 고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찾아오게 됩니다.

    고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해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하자 비류는 동생 온조와 어머니 소서노를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비류, 온조를 따르는 무리들은 제법 많았다 합니다. 무리가 한산(漢山:북한산 추정)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북악산 추청)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류는 서쪽해안가가 마음에 들었지만 신하들은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강을 끼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바다로 가로막혀 군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쉽게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 합니다. 비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미추홀로 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십제(十濟)라고 나라 이름을 정했습니다. 그후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습니다.

    비류가 위례성에 돌아와서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고 있었으므로 참회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비류의 미추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에 모이게 되자 온조는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습니다. 이상은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를 요약한 것입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류가 굳이 문학산 일대에 왕국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사학자들이 지형적인 조건을 꼽습니다. 삼면이 바다이고 갯벌이 발달해 수산물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식량 저장의 수단인 소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문학산이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천연 요새의 기능을 한다는 점, 더욱이 바닷길만 열리면 한반도 해안은 물론 중국과 자유로운 교역이 가능하다는 점에 비류가 이끌렸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죠. 즉, 문학산 일대는 농경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자원의 보고이자 천혜의 요새이며, 대륙으로 통하는 해상교통의 요지였으리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비류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온조 백제에 통합되고 말았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지형적 조건이 여러 가지로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읍국가 수준의 비류왕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 즉 농경을 발전시킬 만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학산 일대엔 농경지로 활옹할 만한 평지가 부족했고 그나마 있는 땅도 척박했습니다. 따라서 한강 이남의 옥토에서 번창한 온조백제를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죠.

    한편 비류가 문학산 일대에 왕국을 건설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광활한 만주벌판과 중국대륙의 서북지역을 되찾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를 떠나온 비류가 산동반도와 발해만, 요동반도, 한반도를 잇는 서해바다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려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 비류백제가 단지 문학산 일대에 세워진 왕국이 아닌 중국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한강 유역에 이르는 거대한 왕국이었을 것이라는 설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같은 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 남북국시대 ~ 고려시대

    1980년대 촬영한 인주 이씨의 재실 원인재의 모습 백제의 영토에서 벗어난 이후 인천지역은 변방지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인천지역은 소성이라고 불렸으며 고려 8대 임금 현종 때는 수주(樹州:부평)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숙종(1096~1105) 때 소성현은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어 지군사가 설치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소성현이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순덕태후 이씨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인예순덕태후는 인주이씨인 이자연의 장녀로 문종의 왕비로 문종비가 된 후 순종, 선종, 숙종 3왕을 낳아 인주이씨가 권력을 장악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인종(1123~1146) 때 경원군은 인주(仁州)로 승격되고 지주사가 설치되었습니다.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이자겸의 딸로 예종비입니다.

    1390년인 공양왕 2년에 인주는 경원부로 승격되고 자연도(紫燕島, 지금의 영종도), 삼목도, 용유도를 속도(屬島)로 삼고, 속군(屬郡)으로 당성군(경기도 남양)을, 재양현(안양)을 속현으로 삼게됩니다. 이렇듯 고려에 와서 인천이 급격히 승격된 이유는 고려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등 7대에 걸쳐 인천이 왕의 외향(외가)이거나 왕비의 내향(친정)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를 가리켜 ‘고려 7대 어향’ 이라고 지칭합니다.

    이처럼 고려시대 초,중기 7대 임금에 이르는 약100여년간 인주이씨들은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한 고려조정 최대의 가문이었습니다. 이들 인주이씨들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가 연수동 간치도(일명 까치섬)에 있으며, 재실인 원인재(연수구 연수2동 584번지)도 1999년 새로 복원되었습니다
  • 조선시대

    임진왜란기 김민선 장군에 의해 보수, 재건된 문학산성 조선 건국과 동시에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강등됩니다. 그러다 인천군으로 개칭된 것은 1413년 태종 13년 당시 전국의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고을 이름 중 주(州)로 끝나는 것이 너무 많아 산(山)이나 천(川)으로 끝나도록 개명함으로써 고을의 등급을 명확히 했는데, 이후 인천이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조 6년(1460)에는 다시 인천도호부로 승격되는데 이때 이후로 조선말까지 인천은 도호부의 지위를 유지하게 됩니다.

    인천도호부청사는 남구 관교동 146번지(문학초등학교 교정 안)에 위치해 있고 조선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인천역사는 인천도호부가 있는 관교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연수구에는 그다지 주목할 거리가 없지만,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로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김민선 장군(부평 출신)과 그가 문학산성을 다시 쌓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으며, 김민선 장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안관당, 또 왜적들이 문학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수리봉 정상 부근에 쌓았다는 왜성터의 흔적 등은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 연수구에 나타난 특징으로는 곳곳에 특정 씨족들이 자리를 잡고 번성하며 자연부락을 형성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조선 훅에 수많은 판서대감과 정승을 배출해낸 동춘동 일대의 영일정씨와 동춘동의 제주고씨를 비롯하여 청학동의 경주 최씨와 박남박씨, 옥련동의 전주이씨와 덕수이씨, 선학동의 부평이씨 등이 그들입니다.
  • 근ㆍ현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는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외교권 박탈은 물론이고 통감부 설치에 의해 정치권을 박탈당하고 이사청이 신설돼 지방행정도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인천지역도 1906년 6월 행정조직 개편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먼우금면이 서면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것은 먼우금면이 인천구읍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일제는 이때부터 의도적으로 우리나라 각 지방의 토박이 땅이름을 바꿔버리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예를 들면 척전마을(척전리)을 서면 3리, 동막마을(동막리)을 서면 4리 식으로 개칭했던 것입니다.

    1914년 4월 1일 전국지방행정구역 조정을 단행한 일제는 자유공원 일대(개항장일대)만을 인천부라 하고 나머지 인천과 부평 전 지역을 묶어 부천군이라 칭했습니다. 부천이라는 명칭은 부평의 ‘부’자와 인천의 ‘천’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었죠. 이에 따라 연수구 전역은 부천군 문학면 관할이 되었습니다.

    1930년 일제는 인천의 행정구역을 확장했는데 이때 문학면의 일부 옥련리와 다주면(주안 일대) 대부분을 인천부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때 옥련리는 송도정이라는 일본식지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1940년 4월 1일부로 부천군 문학면, 남동면, 부내면, 서곳면 전역이 인천부에 편입되고 편입됨과 동시에 대부분 마을이름이 일본식 지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연수리는 연수정으로, 동춘리는 동춘정으로, 도장리는 무학정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그 후 연수지역은 1943년 설치된 인천부 문학출장소 관할로 묶여 있다가 해방 후인 1946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연수구 지역은 인천시 외곽에 위치한 까닭에 한적한 시골 정경을 잃지 않은 유일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말에 연수구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연수 지역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면서 자연부락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원주민들은 보상금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 개발 과정은 단지 시골스런 풍경이 사라진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생활풍습과 전통문화가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인천시 남구 구민이 58만 명에 육박하게 되어 1994년 12월 6일 남구로부터 옥련, 선학, 연수, 청학, 동춘동을 분할하여 연수구를 신설, 1995년 3월 1일 개청하기에 이릅니다.
  • 연수구의 미래

    영종에서 바라본 송도국제도시의 경관 연수구는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의 기반조성을 완료하고 21세기 서해안시대의 중심지로써 도약의 기틀을 마련해 가고 있습니다. 동춘동 해안일대를 매립하여 조성하는 송도신도시는 540여만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7배에 달합니다.

    1공구는 131만 평으로 인천무역센터, 컨벤션센터, 테마파크로 조성할 예정이며, 이미 2, 4공구는 매립이 완료되어 미디어밸리로써의 면모를 갖춰나가게 될 것입니다. 3공구는 76만 평으로 금융, 업무, 상업, 주거시설이 들어서게 되며, 5공구는 97만평으로 연구단지, 호수공원으로, 7공구는 75만 평으로 문화단지, 호수공원이 조성될 예정입니다.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정보, 통신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면서 중국, 러시아 및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환태평양지역의 구심점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공항(Airport), 항만(Seaport), 정보통신망(Teleport)의 트리포트(Tri-Port)기반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송도해상신도시 개발에 부응하는 친수공간, 녹지공간의 확보로 시민의 쾌적한 삶을 보장하는 미래도시환경 조성에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수구, 지명의 유래

  • 미추홀 彌鄒忽

    삼국사기에 명명된 미추홀(彌鄒忽)은 인천의 옛 이름이면서 비류백제의 도읍이었습니다. 사기가 쓰인 고려시대에는 한자의 음을 빌어다 쓰는 가차식 표기였기 때문에 한자를 해석해서 단어를 풀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미추홀을 해석하는 데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 가운데 유력한 설로 좁혀진 몇 가지만 소개해보겠습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얘기는 물의 고장이라는 해석입니다. 미는 물의 원시 발음으로써 풀이하고 추를 사이로, 홀을 골로 보는 것인데요, 문학산 일대가 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물의 고장, 다시 말해 물골이었다는 뜻이라고합니다.

    다음으로 거친 고장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고구려가 인천을 점령했을 때 매소홀(買召忽)로 부른 것에서 거슬러 유래를 풀어보는 방식이죠. 매소홀의 매를 거칠다는 뜻으로, 소를 사이로 보면 거친 고장이 되는데, 비류가 이곳을 말하기를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 수가 없었다고 한 것과 일치하는 해석입니다.

    마지막으로, 뿌리의 고장이라는 말로 바탕골이란 뜻으로 풀이가 가능합니다. 즉, 미추를 ‘밑’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미추홀은 근원이요 바탕이 되는 곳, 즉 도읍이 되는 곳으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미추홀이 비류백제의 도읍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가능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먼우금 遠又邇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가 관할하는 지역은 모두 10여 개의 면이었는데 지금의 연수지역 대부분은 먼우금면에 속하였습니다. 지금의 청학동, 옥련동, 동춘동, 연수동 등이 모두 먼우금면에 속해 있었고 문학산 동쪽에 있던 선학동 지역만 부내면(府內面:도호부 직할지역) 관할이었습니다.

    먼우금을 한자로는 원우이(遠又邇)이다. ‘멀 원’에 ‘가까울 이’이므로 풀이하면 ‘멀고도 또 가깝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지명이 유래된 데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첫째, 동춘동과 연수동 사이에 커다란 갯골이 있어 4~5백 미터밖에 안 되는 곳이었지만 걸어서 가려면 10리(4km) 이상을 돌아서 다녀야 했다는 것입니다. 눈앞의 지척인데 가려면 먼길이었다는 뜻에서 먼우금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둘째, 먼우금을 ‘먼오금’이라는 말이 변화된 것이라고 보는 설입니다. 이 지역의 산줄기가 멀리서 뻗어내려 오다가 마치 팔, 다리의 오금처럼 휘어졌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죠.
  • 연수구의 법정동

    송도유원지와 동춘동의 앞바다를 메워 만든 송도국제도시의 모습(위키백과)

    01. 옥련동

    옥련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 옥동, 한진리(현재 송도역 부근),옹암리(현재 유원지 입구부근)등 지역입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먼우금, 한나루, 독바위, 송도(일인들이 능허대를 중심한 일대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앞에 섬까지 있어 송도라 불렀다)를 병합하여 옥련이라 해서 문학면에 편입시키게 됩니다.

    1936년 제1차 부역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송도정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동명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옥련동이 되었습니다. 옥련동이란 유래는 백옥같은 돌이 많다하여 옥골 또는 옥동이라 부른것에서 그 유래를 살필수 있으며, 2003. 3. 1일 옥련동에서 옥련1동과 옥련2동으로 분동되었습니다.

    02. 선학동

    선학동은 문학산의 본래 인천부 구읍면 지역으로 도재 또는 도장이라 불리는 지역이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지물, 늑각부리를 병합하여 도장리라하고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부역 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무학정이라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무학은 문학산이 춤을 춘다는 뜻인데, 여기에 뒷산인 선유봉의 앞자를 빌려, 선학이라는 이름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03. 연수동

    연수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수지, 솔안말, 새터말, 장승배기, 마리 구레매기, 머그미, 새말, 갱고지, 배꼽부리, 함박매를 병합하여 연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 부역 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연수정이라 부르게됩니다.

    해방후 동명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쭉 연수동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연수동이란 이곳이 문학산 남쪽에 위치하여 따뜻하며 해안의 공기가 좋아 건강에 좋은 곳이란 뜻에서 생긴 동명입니다.

    04. 청학동

    청학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이란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릉, 뒷골, 물푸레골, 안골, 옥터를 병합하여 청릉과 문학산의 이름을 따서 청학리라 하여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킵니다. 1940년 4월 1일 제2차 인천부역 확장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청학정이라 하였고, 해방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월 1일부터 청학동이 되었습니다.

    05. 동춘동

    동춘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 지역으로 청량산 동쪽이 되므로 동촌 또는 동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쇠미, 풀무골, 각골, 자앞, 도굴, 동막을 병합하여 동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4 월 1일 인천부역 확장때 인천부에 편입하여 일본식으로 동춘정이라 부르게 됩니다. 해방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1 월 1일부터 동춘동이 되었습니다.

    06. 송도동

    ‘송도’는 러일전쟁 당시 옥련동과 동춘동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군함(송도함)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송도유원지 앞을 매립하여 조성한 송도국제도시는 그 부근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죠. 송도국제도시는 간척과 함께 면적과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으며 국내·외적으로 관심이 집중되는 지역입니다.

    송도동은 2006년 3월 6일자로 인천광역시 연수구 조례 제485호에 의거 법정동이 설치되었으며 송도지역이 경제자유구역 지정에 따른 국제도시개발이 가속화됨에 따라 2007년 1월 1일 지방자치법 제4조에 의거 동춘2동에서 송도동으로 분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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